4일과 9일, 성산읍 고성오일장

고성오일장 입구.

봄에 좀처럼 보기 드물게 화창한 날이다. 벌써 길가에 노랗게 피어오른 유채꽃 물결에 마음이 달아오른다. 동쪽으로 차를 달려 고성오일장을 찾았다.

조선 초기 제주도에 제주읍·대정읍·정의현 등 3읍이 세워질 당시 정의현성은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 자리에 있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일대에 바람이 많이 불어 농사도 불리하고, 외구가 창궐하면서 정의현청을 진사리(지금의 성읍민속마을)로 옮겼다. 고성이란 이름도 옛성터라는 의미로 붙여졌는데, 조선 태종 16년에 안무사 오식(吳湜)이 쌓았다는 고성(古城)의 흔적과 당시에 장이 섰다는 묵은 장터거리가 지금도 있다.

고성 민속오일장은 서귀포 민속오일장과 같이 4일과 9일에 열린다. 장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장터가 일주도로변에 있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표선 오일장이 3시경에 파시하는데 반해 고성 오일장은 6기까지 손님들이 이어진다.

떡을 파시는 사장님은 “다른 장에는 구경삼아 오는 손님들이 많은데, 고성 오일장은 물건을 사기 위해 장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 장사가 잘 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장옥.
90세 김 할머니.

장터 입구에서 지난번 표선 오일장에서 만났던 뻥튀기 박 사장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뻥튀기의 인기는 표선이나 고성에서나 하늘을 찌른다.

장옥 입구에서 연로한 할머니가 채소와 해조류를 팔고 계신다. 고성에 사신다는 김 할머니이신데, 연세가 90세라 하셨다. 무와 당근, 냉이, 톳, 미역 등을 파는데,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으시다. 손님 한 분이 “채소들은 할머니가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것들이고, 해조류들도 썰물에 직접 해안에서 채취한 것들”이라 했다. 할머니가 젊어서는 베테랑 해녀이셨는데 이제는 연세가 드셔서 잠수는 안하신다고 했다. 할머니 얼굴에 켜켜이 쌓인 삶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배가 고파 음식점을 찾는데, 민속 오일장에 속한 음식점은 은성식당이 유일하다. 음식점 안에는 손님들이 가득했다. 음식은 국밥과 국수 두 종류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밥은 5000원, 따로 국밥이 6,000원이고, 고기국수가 5000원이다. 고기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허세가 작동해서 가장 비싼 따로국밥을 주문했다. 국밥 맛은 여느 장터국밥과 비슷한데, 호박무침과 깍두기, 무채, 배추김치 등 반찬이 푸짐하다. 식당 사장님과 말씀을 좀 나누고 싶었지만 손님이 붐벼 말 붙일 틈이 없었다.

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오래된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장옥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대장간이다. 대장간 이름이 ‘동부대전 철공소’이다. 상호에서 알 수 있듯 대전이 고향인 송형균(75) 사장님이 주인이다. 송 사장님은 어려서 대장간 일을 배웠다. 그런데 그 일이 당시에는 크게 벌이가 되지 않아 다른 일을 찾기 위해 지인을 따라 제주에 왔다. 그런데 계획한 일이 잘 되지 않아 제주에서 다시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일을 시작한지 35년이다.

오래된 대장간이 있다. 해녀 수가 감소하면서, 대장간도 어려움을 겪는다. 공장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에 대장간을 운영한는 게 쉽지 않다.

대장간에서 낯과 호미, 손도끼 등 농기구들과 주방용 칼 등을 만든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게 빗창과 호멩이 등 해녀 용구들이다. 송사장님은 “예전에 해녀들이 많을 적엔 대장간 일도 수입이 짭짤했는데, 해녀들이 줄어드니 이 일도 별로”라고 했다.

송사장님은 고성장 외에도 표선장과 세화장에 나가는데, 수입이 많지 않고 소일거리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상품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시대, 어렵게 명맥을 이어온 대장간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주변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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