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 & 사람 그리고 문화-21

안도인 해녀의 고무옷과 물질도구(사진=문화재청)

 그의 나이 25세, 여수로 출가물질을 갔었다. 때는 1950년, 너나 할 것 없이 다같이 못먹고 못 입고 힘들게 살던 시기였다. 그래도 그는 타고나길 명랑 쾌활하여, 장난도 잘치고 낯선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는 붙임성이 있었다. 여수도 타향이었지만 이웃집 할머니와도 친하게 지내며 고향같이 살아갈 무렵, 그 할머니가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왔다.

“내 외손주 아이를 제주도로 데려가 키워줬으면 좋겠어”
그는 결혼하여 다섯 살짜리 딸을 두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얼마나 어려우면 생판 남인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할까. 할머니 입장에서는 당신 사후에 부모없는 손주의 미래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나도 내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왔으니...”
그는 제주도로 돌아올 때 아이를 데려왔다. 나이는 여섯 살, 이름은 복녀. 그는 호적에 복녀를 자신의 맏딸로 올려 키웠다.

  보길도로 출가물질을 갔다가는 남자아이를 만났다. 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한 나라에는 고아가 된 아이들이나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너, 나랑 제주도 가서 살래?”
“네”
“고생해도 괜찮아?”
“네, 고생해도 좋아요”
“그럼, 가자”
이렇게 해서 아이를 또 데려오자 시어머니는 기가 막혔다. ‘우리 먹고 살기도 힘든데...’라고  했지만 어차피 그가 먹여 살릴 일이었다. 그의 남편은 4.3때 일본으로 도피하여 계속 일본에 살고 있는 터였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아들보다 나이가 많아 시어머니 밑으로 호적을 올렸다. 자신에게 막내 시동생이 된 것이다. 얼마 있어 그 ‘막내 시동생’ 이 어려운 부탁을 해왔다.
 “제 동생도 같이 좀 데려다 살면 안돼요?”
그는 그런 마음을 헤아렸다.
“혈육과 떨어져 사는 고통이 얼마나 클 것인가. 어린 나이에. 그리움이 병이 되면 안 되지”
힘들게 여비를 마련하여 보길도로 들어가 동생을 데려왔다.
모두 스무살이 넘어 독립할 때까지 그는 알뜰살뜰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였다. 신혼에 떠나 중년에 돌아온 것만도 기막힌데 동반자가 있었으니 작은 부인이었다. 넓지 않은 주거 공간, 애들도 올망졸망, 그는 남편과 작은 부인과 셋이서 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 수밖에 없었다. 싫다고 말도 못하고 감정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그 때 그의 마음은 훗날 듣는 이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그는 1925년 구좌읍 행원리에서 태어난 안도인(1926∼2004)이라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작은 부인에게까지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하니 이름 그대로 ‘도인’임에 틀림없다.

 김형훈 기자, 신문에 해녀기획 연재를 오랫동안 했던 김 기자는 제주가 지키고 보존해야할 제주다움에 주저없이 1순위로 ‘공동체 정신’을 꼽았다. 알려지지 않은 ‘도인’들이 참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해녀들은 공동체 정신이 투철하여, 한 마을 사람들로 작업공동체에 인생공동체로 사는 것은 기본이고 학교바당이나 마을바당이라 하여 공동물질로 지정사업을 충당하는 지역사회의 주체적인 운영자들이었다. 4.3이라는 잔인한 광풍 속에서 마을이 유지되고 아이들이 자라는데 원동력이 된 해녀들의 공동체 의식은 육지에 가서도 열두 폭 치마처럼 펼쳐져, 힘든 가정과 가난한 아이들을 품어 안았던 것이다. 

 이철순 희망재단 이사장, 평생을 여성노동운동에 바친 그는 희망재단을 만들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에 여학교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나의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한 그가 몇일 전 제주에 잠깐 다니러 왔다. 
“숙희씨, 제주 사람들 정말 대단해. 나는 제주 여성들을 아주 존경하게 되었어!”
늘 진지하고 차분하던 그가 이번에는 아주 진지하게 흥분하며 자신과 함께 온 사람을 가리켰다. 이철순 이사장을 태우고 운전을 해 온 사람, 점심밥을 먹을 때 여행가이드인 것으로 소개를 받았고 내내 별로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저이가 가이드일을 하면서 자기 친구들 다섯명이랑 돈을 모아서 아프리카에 여학교 세우는 일을 돕고 있다는 거야”
 와우! 이사장의 귀띔에 다가가서 좀 자세히 들으려 했더니 그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더니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저쪽으로 피해버리고 말았다.

“제주의 어떤 여고에서는 아주 조직적으로 나서서 아프리카에 여학교를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어. 최정숙이라는 대단한 여성 교육자, 독립지사가 제주에 계시더라, 그런데 왜 여태 교과서에 안 실렸나 몰라. 이번 여행은 완전 제주 여성에 대한 감탄여행이야” 

 무한 경쟁, 승자 독식이 판을 치는 세상에, 평범한 ‘도인’들이 구석구석 살고 있는 제주, ‘나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야’ 어깨가 으쓱, 자랑스럽다. 
                                                                                           오항숙희 / 여성학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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