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 & 제주 그리고 문화 - 24

 “얘들아, 나, 부탄에 간다”
어린시절 친구들의 사이버 수다방 카톡에 이렇게 한 줄을 올렸더니 부럽다고들 난리가 났다.
“와우, 내가 젤 가고 싶은 행복지수 1위 국가, 부럽당”
“너는 서귀포 살아서 우리 중에 행복지수 1위인데, 부탄까지?, 부럽다”
“나는 둘째치고 우리 딸이 가방 들고 갈 사람 필요하면 자기가 한댄다. 하하”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해도 이렇게 부럽지는 않을 것인데... 솔직히 넘 부럽다”

 그 친구들에게 부탄에 가면 행복의 비결을 반드시 알아와서 알려주겠노라 호언장담을 하고 떠났다. 태국 방콕에서 갈아 탄 부탄항공 비행기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손님들을 더 태우고 부탄의 가장 서쪽인 파로공항에 내렸다. 수도 팀푸는 거기서 자동차로 1시간, 숙소는 팀푸시 드룩율(용의 계곡-부탄은 용을 엄청 좋아한다)호텔이었다. 호텔 주인이라는 젊은 남자는 시원하게 생긴 훈남에다 체구는 우리나라 씨름선수 같이 당당했다. 그런 그의 가슴에 달린 작은 뱃지, 자세히 보니 젊은 남녀의 사진이었다.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달고 살다니, 팬심이 참 대단한 사람이네,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부탄을 떠나기 전날, 내가 그에게 그 뱃지를 갖고 싶다고 사정하게 될 줄이야.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다고 느꼈던 이 뱃지는 어찌하다가 내가 가장 갖고 싶은 물건이 되었단 말인가. 

 부탄은 왕국이고 그래서 왕과 왕비가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팀부시 번화가로 나오니 옹초크(호텔 주인 이름)의 가슴에서 본 젊은 남녀의 사진 포스터가 도처에 붙어있었다. 당연히 부탄에서 최고로 핫한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인줄 알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들이 왕과 왕비였다. 둘 다 젊은데다가 둘 다 어찌나 미남미녀인지, 게다가 근엄한 공식포즈가 아니라 왕비가 왕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왕의 시선은 왕비를 향해 있으니 연예인들로 착각을 할 수밖에. 옹초크의 뱃지를 달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며 심지어 관공서에도 이런 사진이 붙어있었다.

 처음에는 개인 숭배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며칠 지나면서 보니 이건 가족 같은 친근감이었다. 가정집에도, 공무원들의 책상 위에도 왕가의 사진이 자기네 가족사진처럼 놓여있었다. 사진의 내용도 다양해서 젊은 왕과 왕비가 세 살배기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단란한 모습(이건 우리나라로 치면 송중기 송혜교 부부가 결혼한 후 아기를 낳아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 일찌감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선대왕과 아들의 다정한 모습, 선대왕이 아들며느리와 함께 한 모습, 현재 왕이 왕세자 시절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 왕이 불교 최고지도자와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사진 등등을 보며 며칠을 지내노라니 어느새 나도 그들을 격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탄의 왕족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 왕권을 포기한 개념있는 존재들로, 최근에 왕이 국민들에게 한 말은 ‘행복하시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한 일을 찾으시라’였다고 했다. 만나 본 공무원들도 한결같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의 결과로 마을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한다. 모든 혜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진심어린 태도로 반복했다. 감동이었다. 행정편의주의라는 말은 부탄에 없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왕부터 부패 없이 국민들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놓고 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왕을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가 사랑이 되어 그들을 사진으로라도 가까이 놓고 살게 하는 것 같았다. 너무나 예쁜 왕족. 나는 외국인이지만 그 훌륭한 마음을 기억하고자 그들의 사진을 품고 싶었다.

 뱃지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현지인 가이드 ‘따와’였다. 따와는 26세의 눈, 코, 입, 귀, 키가 다 큰 부탄 남자로 활을 잘 쏘는 부탄의 주몽이었다.

 “왕비는 우리랑 같은 평민이에요. 왕이 왕자시절에 어떤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왕비를 처음 보았어요.”
“교사였나요?”
따와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초등학생?”
“네”
따와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박! 10세가량의 나이 차이, 첫눈에 운명을 느낀 왕자는 그녀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대망의 혼례를 올렸고 사진에서 익히 보아온 그 아기를 낳은 것이다. 그러니 전국민적 레알 러브스토리인 셈! 내 반드시 저 뱃지를 소유하고 말리라.
그 뱃지를 구할 길이 없다고 하면 당신 것이라도 떼어달라고 떼쓸 심산이었는데 옹초크는 기쁜 듯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스 맴, 쓰리!”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 일행이 셋이었던 것이다. 부탄은 온 국민의 신조가 ‘평등’이다. 운좋게 참석했던 5천명 이상이 모인 불교집회에서 음식을 나눠줄 때도 ‘더 달라’ 요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알아서 다 똑같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팁을 주거나 선물을 줄 때도 그들은 ‘직접’, ‘공개적’으로 주라고 했다. 그러니 차별을 둘 수가 없었다. 뱃지를 달라고 한 사람은 나였지만, 같이 온 일행까지 챙겨주는 것, 그것이 평등이었다. 질투나 시샘이 싹 틀 일이 없었다. 그래서 행복한 나라였다.

                                                                                        글‧오한숙희 / 여성학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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