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장태욱 편집국장

1957년 송당목장을 방문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이승만 일행.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승만이다. (사진은 제주도지방의정연구회)

19세기 말 하와이에서 사탕수수가 광범위하게 재배됐다. 노동자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던 농장주들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 알렌(Allen·1858~1932)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켰다.

1903년 1월, 조선인 102명을 태운 배가 인천항을 출발한 이래, 1905년까지 7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대부분 남성들이었는데, 이들은 망해가는 조선에서의 궁핍한 삶을 뒤로하고 풍요가 넘치는 열대의 낙원에 닿길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주 달랐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는데 임금은 하루 40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은 일거리가 없을 때에는 미국 본토에 가서 철도 놓은 노동도 했다. 노예 같은 생활이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승만의 하와이 교민에 대한 기만행위가 시작되는데, 리영희 선생이 쓴 ‘역정(1988, 창작과비평)’에는 하와이 교민의 증언이 생생하게 등장한다.

이승만은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자신을 독립운동가라고 소개하며 ‘국민회’라는 조직을 만들자고 했다. 이역만리에서 떠돌던 불쌍한 노동자들은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며 모금도 요구했는데 노동자들은 끼니를 거르면서도 돈을 모았다.

이승만은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거기에 가서도 하와이 노동자들에게 돈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노동자들은 돈을 모아 인편으로 가져가보면 이승만은 어김없이 터진 양말을 신고 허름한 행색을 비췄다. 그런데 돈을 보내달라고 자주 조르기에 주민 대표가 몰래 하숙집을 방문했는데, 이승만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동안 불쌍한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 궁핍한 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재미 열사 장인환이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다. 당시 스티븐스는 조선인을 멸시하며 일본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당시 재미조선인들은 장인환을 돕기 위해 돈을 모으고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통역이 필요했다. 조선인들은 당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던 이승만에게 통역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은 “사람을 죽인 죄인을 위해 통역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선인들은 이승만 대신에 대학생 신흥우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기가 막힌 것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국민회’를 대하는 태도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꾸준히 돈을 보내준 국민회 회원들의 고국방문도 금지했다. 대신에 ‘태평양동지회’라는 친이승만 단체를 이용해 교민사회를 분열키며 국민회는 빨갱이 취급을 했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회가 21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날'을 제정하자는 결의안을 상정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결의안에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한국 잡지를 발간하고 한국 YMCA를 조직한 점, 일제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 점, 1945년 독립 후 1948년 8월15일 대통령에 당선됐고 1960년 4월27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 점 등이 근거로 포함됐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리영희 선생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했던 활동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자국 동포에 대한 사기와 착취에 해당한다. 물론, 호놀룰루 시의회가 이를 제대로 알 리가 없다. 현지 영사관이라는 곳이  철저하게 정부의 입장에서 활동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블랙리스트에 지목한 ‘국민회’의 눈물 같은 것을 하와이인들이 이해할 턱이 없다.

되돌아보면 제주4·3,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 대한민국 현대사 모든 비국이 초대 대통령을 제대로 뽑지 못했기 시작됐다. 그 뒤에는 미군정의 간섭과 조작이 있었다. 강대국 틈에 낀 약소국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하와이에서 억울하게 살았던 교포들의 영전에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