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학의 선구자 나비박사 석주명(4) 석주명의 소년 시절

석주명의 가족(1934년). 맨뒷줄 오른쪽부터 동생 석주일, 석주명, 형 석주흥, 셋째줄 왼쪽 동생 석주선, 둘째줄 왼쪽 두번째 어머니 김의식 등.

석주명(石宙明)은 1908년 10월 17일 평양 대동문 근처에서 평양에서 가장 큰 요릿집을 하는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1881~1938) 사이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평양, 개성, 일본 가고시마에서 공부했고, 개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나비 연구를 하였으며, 해방직전 제주도에 2년 동안 살면서 제주관련 자료를 수집하였고, 해방이후 서울에서 교육과 연구를 하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6일 서울에서 불의의 사고로 작고하였다. 그가 학문적 절정기인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은 그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형제들 가운데 사업가였던 형 석주흥(1905~?)은 월남하지 못했고, 막내 석주일( 1914~1981)은 서울에서 피부과 의사를 지냈으며, 전통의상 전문가였던 누이동생 석주선(1911~1996)은 동덕여대 교수와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장을 지냈다. 석주명이 위대한 학자로 되는 데는 형제들의 도움도 있었다. 형 주흥은 나비채집여행을 할 때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막내 주일은 나비채집을 함께 했으며, 누이동생 주선은 그의 유고집을 펴내 세상에 알렸다. 석주명은 김윤옥과 1934년 결혼하여 1948년 이혼하였고, 혈육으로는 미국에서 북일리노이주립대학 교수를 지낸 외동딸 석윤희(1935~)가 있다.

석주명은 다른 아이들처럼 6세(1914년)에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배웠고, 9세(1917년)에 신식학교인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 들어가 11세(1919년)때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하여 자주독립을 외친 3.1만세운동을 경험하였다. 그는 어려서는 공부보다는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특히 동물을 좋아해서 아버지 몰래 기르기도 하였다. 소년시절 석주명은 보통학교 선배이자 형과 동년배인 안익태(1905~1965)와 친하게 지냈다. 애국가 작곡가로 잘 알려진 안익태는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을 잘 연주하였고, 숭실학교 때 숭실대학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정도로 음악의 신동이었는데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훗날 석주명이 만돌린과 기타를 잘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년시절 친하게 지내던 안익태의 음악적 영향이 컸다.

석주명은 13세(1921년)에 평양의 대표적 기독교계열 민족학교인 숭실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평양의 학부모들은 3.1운동으로 민족의 자긍심이 높아지면서 자녀를 숭실학교에 진학시키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130여명에 불과했던 숭실학교 학생 수가 이듬해인 1920년 620여명이 되었고, 1922년에는 700여명 등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석주명이 입학할 당시 숭실학교는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서 2부제 수업을 실시할 정도로 교육환경이 열악하였다. 게다가 숭실학교는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지 못한 각종학교여서 학생들은 졸업해도 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자격시험을 별도로 치러야 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22년 발표한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르면, 기독교계열 학교가 학력을 인정받으려면 성경과목과 예배의식을 폐지해야 했는데, 학교당국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22년 6월 숭실학교 60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에 성경교과를 포기하고 학력을 인정받는 ‘고등보통학교’로 승인받을 것을 요구하면서 동맹휴교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숭실학교를 떠났다. 석주명도 이 과정에서 숭실학교를 다닌 지 1년 반 만에 중퇴하게 되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