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장태욱 편집국장

섬은 고난의 상징이었다. 지나간 모든 왕조들의 관심에 섬사람들은 없었다. 섬사람들이란 조정에 필요한 물자를 공출하는 수탈의 대상이자 왜적이 침입하면 앞에서 몸으로 막아야 할 전방에 불과했다.

근대는 바다를 통해 이 땅에 상륙하면서 섬이 소란스러워졌다. 앞서 근대를 경험한 섬사람들은 봉건질서에 저항했고, 근대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자들은 제국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남로당의 이승엽은 영흥도에서, 김달삼은 제주도에서, 진보당의 조봉암은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우연은 아니다.

저항의 싹을 자르려는 세력이 총과 칼을 들고 섬으로 몰려들면서, 섬은 비극의 상징이 됐다. 신축민란이 그렇고 제주4·3이 그렇다. 두 항쟁에서 외세와 부패한 정부가 제주민초들에게 가한 보복의 역사는 섬의 운명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제주도민의 피의 값을 제대로 인식한 이가 있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서슬 퍼런 반공주의를 동원해 사상의 자유를 옥죄던 1987년,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제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다. 나도 용공조작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전라남도의 작은 섬 하의도 출신 김대중 후보는 탄압을 피해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정치적 언어 ‘제주4·3’을 흔들어 깨웠다. 거목 김대중의 높은 인권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은 그후로 10년이 지난 1997년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외환위기 속에서도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인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99년 인도네시아 군이 동티모르에서 살인과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는 일이 발생하자 UN 다국적군으로 상록수부대를 파병했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와 호주섬 사이에 있는 티모르섬의 동편에 있는 국가로, 역사 속에서 제주섬 못지않은 수탈을 경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가 그해 12월에 남긴 수상 연설의 일부분이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시대로서 부(富)가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정보화시대는 부의 편차가 심화되어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빈부격차도 커져 갑니다. 이것은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인권의 탄압과 무력의 사용을 적극 반대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보화에서 오는 새로운 현상인 소외계층과 개발도상국의 정보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인권과 평화를 저해하는 장애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보의 편차, 개인간·국가간 불평등, 무력의 사용 등을 21세기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인권과 평화의 장애요소들을 제거할 것을 호소했다.

19일 열린 JIBS제주방송 주최 제주시 갑 선거구 후보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송재호 예비후보가 남긴 발언이 화제다.

송 예비후보는 정의당 고병수 예비후보에게 고 후보가 강조한 '생태환경도시' 비전을 도민경제와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고병수 예비후보는 환경·평화·인권을 생태환경도시의 주요 비전으로 제시했고, 송 후보는 이를 받아치며 "평화와 인권이 밥 먹여주냐고 묻는 겁니다"라고 발언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이다.

제주4·3 당시 토벌대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의 학살을 피해 산으로 피신해 굶주린 사람에겐 평화가 밥이었다. 일본군에 세뇌돼 집단 자살을 선택한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평화가 밥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 집단 학살된 타이완 원주민들에겐 평화가 밥이었다. 인도네시아 군에 짓밟히고 학살당한 동티모르 주민들에겐 평화가 밥이었다. 평화가 밥인 근거를 어찌 다 나열하겠나?

김대중의 껍데기는 계승하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이들에 다시 말한다. 침략과 수탈에 점철된 제주섬엔 평화가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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