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음…남영호 참사 40주년]
<상> 잔혹한 ‘12월15일’ 참사 재구성

해방 이래 끔찍한 대참사로 손꼽힌 남영호 사건이 오는 15일 40돌을 맞는다. 1970년 그날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자들, 바다에 묻힌 가족들을 그리며 통곡한 유족들, 한평생 가해자로 살아갈 선장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무려 326명의 목숨을 앗아간 바다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다. 남영호 사건을 외로이 기억하는 위령탑은 방치된 채 황량하게 섰다. 유족들의 진술과 문헌, 보도기사 등을 바탕으로 시린 기억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현재를 돌아봤다. <편집자>

▲ 남영호 사고가 일어났던 1970년 12월, 해군과 공군, 해양경찰대, 미군 항공기와 일본경비정들이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자료 제공=제주특별자치도)

▷ 죽은 자… 326명 삼킨 무정한 바다

쾌청한 14일 오후 5시. 잡화를 팔던 김 씨는 오일장을 서둘러 정리하고 서귀포항으로 향했다. 이날은 꼭 부산항에 도착해야 했다. 부산에 가서 물건을 많이 장만해 연말연시 대목을 보기 위해서다. 감귤 철에 서민들의 지갑이 두터운 때도 잘 노려야 한다.

도착한 서귀포항은 엄청나게 북적였다. 김 씨처럼 포목·의료·생필품을 구입하려는 상인, 부산에 귤과 해산물을 팔려는 이들이 구름떼 같았다. 일찌감치 예감은 했다. 폭풍 경보로 이틀간 발이 묶인 승객과 화물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엎친데 덮친듯 이날따라 제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여객선 4척 중에 도라지호가 화재사고로, 제1제주호는 수리 탓에 취항하지 않았다.

또 다른 포목장수 정 씨는 운이 좋았다. 뒤늦게 도착한 항구엔 남영호가 이미 떠난 상태였지만, 동행하던 부인이 경찰서장의 배우자인 까닭에 배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수 백 명을 태웠던 배가 돌아왔다. 소위 ‘빽’ 좋은 이웃을 둬 다행이라고 여긴 게 나중에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녁 7시25분. 중간에 경유한 성산포항에서는 선박업자와 선장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성산포항에 사람과 화물이 떼로 모여 너도나도 승선을 요구했다. 화물이 훨씬 넘쳐 처음에 선장은 운항을 거부했다. 하지만 감귤 시기는 선박 업자에게 대목이었다. “날씨도 좋고 풍랑도 없으니 가달라. 짐을 내리면 내가 망신당할 처지니 봐 달라.” 선원들도 동조했다.

남영호는 감행했다. 정원 302명보다 36명을 더 태웠다. 화물은 정량인 150톤을 3배나 초과한 500톤을 무리하게 실었다. 배 앞·뒤, 옆에 수 천 개의 감귤 상자와 배추 꾸러미를 꽉꽉 채웠다. 배가 왼쪽으로 5도 가량 기울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적재량을 넘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출발할 때 기우뚱거렸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스쳤다.

15일 오전 1시15분. 사람들에 부대끼며 불편한 잠에 겨우 빠져들 무렵. 대마도 서쪽 100km 지점을 항해하던 남영호는 갑자기 이상한 엔진 소리를 내며 모든 전기를 껐다. 캄캄한 선체는 급속도로 왼쪽으로 기울더니 35분이 지나 완전히 뒤집혔다. 우왕좌왕한 사람들은 전복된 배에 올라타거나 매달려 죽음과의 사투를 벌였다. 김씨, 정씨처럼 실패한 이들은 허우적거리다 끝내 칠흑 같은 바다 속에 빨려 들어갔다. 바다는 승객 338명 중 326명을 집어 삼켰다.

▷ 산 자… 생사(生死) 오갔던 끔찍한 순간

‘제발, 사람 살려.’ 순식간에 일어난 생지옥이었다. 둥둥 떠 있던 감귤 상자나 널빤지를 부여잡으며 어둡고 차디찬 허공을 향해 구조를 요청했다. 모두 허사였다. 침몰 소식을 들은 일본해상보안청이 바로 무선으로 SOS통신을 한국에 전했지만 치안당국은 사고가 난지 6시간이 흘러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절한 소리들도 하나둘씩 바다 속에 잦아들었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영하의 바닷물 추위와 밀려드는 졸음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다.

▲ 지난 1970년 12월16일자 <동아일보> 1면 보도.

“차가운 바닷물에 몸이 추워오는 것도 견딜 수 없거니와 졸음이 오는 것은 더욱 참기 어렵게 되었다. 술 취한 사람이 겨울에 길가에서 자다가는 동사한다는 말을 생각하니 나도 잠이 들다가는 영락없이 죽는다는 생각도 들어 몸을 꼬집어 잠을 쫓았다. 약 3시간이 지나자 손발이 저려오고 일부는 마비되기 시작했으나 육지나 배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아도 날이 샐 기척도 없었다.”

당시 한국 어선에 의해 침몰 4시간 만에 기적처럼 구조된 최 모씨는 16일 <동아일보> 보도에서 이같이 전했다. 부산에 아들을 보겠다는 집념하나로 고통을 버텨낸 최 씨는 구조 뒤에 아들을 만났다. “아들은 나를 보더니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껴안고서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다가 울음을 터뜨리고는 ‘10여명 살아난 중에 어머니가 끼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 또 흐느꼈다.”

최 씨처럼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2명. 이중 8명은 일본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생존자 중엔 책임을 면치 못할 선장 강 모씨와 통신사 김 모씨도 포함됐다. 구조 당시 대부분 실신 직전의 상태였다.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한국 치안당국에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치안당국은 SOS수신을 받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부산지방검찰청은 이틀 뒤 선장 강 씨와 선주 강 씨, 부산해운국 직원 3명 등 5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했다. 뒤늦게 밝힌 사실은 선장과 기관장 등 6명이 무자격자이고, 선원명부에 등재되지 않은 선원들이 배에 탔다는 것이다. 선박 검사를 맡던 경찰관 4명은 직무유기로 구속됐다. 사고 당시 구조신호를 받지 않은 순경도 직무유기가 인정됐다.

▷ 남은 자…가슴 속 시린 한(恨) 남아

수많은 엄마, 아빠, 아들, 딸이 묻힌 제주 바다는 한동안 눈물로 변했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은 열 살배기 A씨(51·서귀포시 상예동)는 온종일 울며 엄마를 찾아다녔다. 엄마의 상실은 어린 마음에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됐다. 활달하던 성격도 의기소침하게 변해버렸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고통 때문에 술로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A씨는 저 매정한 서귀포항만 원망하며 여태껏 살아 왔다.

저마다 사연 얹은 그리움들은 12월15일 그날을 들춰내고 있다.

“자식밖에 모르던 순수한 분이셨는데….” 당시 어엿한 청년이었던 B씨(74·서귀포시 서귀동)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어머니는 연말에 대목을 볼 것만 생각하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3일 뒤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오셨지. 세월은 자꾸 흘러가는데 고통은 여전히 가시지 않아. 참극보다 참극이지.”

그 때 금액으로는 1억7000만원의 큰 재산 피해를 냈다. 그 당시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됐다. 현재 국내 해난 대참사로 기록된 대표적인 사건들 가운데, 1987년 6월16일 경남 거제군 앞 해상에서 일어난 남해유람선 ‘극동호’ 화재·침몰사고는 승선원 86명 중 27명이 숨졌다. 지난 1993년 10월 전북 부안군 앞 해상 참사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도 인명 피해가 292명으로 남영호 피해 규모보다는 적었다.

비극을 부른 남영호 사고는 적재정량 3배가 넘었던 무리한 과적, 항해부주의, 긴급신호를 발신한 뒤 신속하게 대처하지 무능함이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이날의 참상을 바다는 알고 있다. 미처 찾지 못한 시신 300여구는 여전히 서귀포와 부산 바다의 경계 어디쯤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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