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음…남영호 참사 40주년
<하> 산으로 간 남영호…벌써 잊었나

위령탑은 ‘내동댕이’… 유족 발길도 뜸해
그간 ‘뒷짐’ 행정, “대책 고민” 관심 보여

해방 이래 끔찍한 대참사로 손꼽힌 남영호 사건이 15일 40돌을 맞는다. 1970년 그날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자들, 바다에 묻힌 가족들을 그리며 통곡한 유족들, 한평생 가해자로 살아갈 선장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무려 326명의 목숨을 앗아간 바다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다. 남영호 사건을 외로이 기억하는 위령탑은 방치된 채 황망하게 섰다. 유족들의 진술과 문헌, 보도기사 등을 바탕으로 시린 기억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현재를 돌아봤다. <편집자>

▲ 서귀포시 영천동에 위치한 남영호 사건 공동묘지와 위령탑이 방치되고 있다. 대문은 검붉게 녹슬고 위령탑은 거무튀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족들도 하나 둘 죽고. 나도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상태로 남겨놓고 가겠어. 속 시원하게 눈을 못 감지, 못 감아….”

폐암에 걸려 투병 중인 남영호 사건 유족대표 김동일 씨(74·서귀동)가 몸을 추슬렀다. 남영호 사건 40주년 위령제를 지내려면 할 일이 산더미인 까닭이다. 지난 13일, 이날도 시청에 지원을 받으려고 불편한 몸을 조아릴 땐 속으로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세월이 흘러 통장 잔고에 있던 보상금은 이미 바닥났고, 유족들과 주민들의 관심도 멀어졌다고 했다. 그를 만나 서귀포시 영천동 남영호 묘역 동행을 요청했다.

고립 또 고립…바다에서 이젠 산으로

김 씨와 함께 방문한 남영호 사건 공동묘지와 위령탑은 지금 방치되고 있다.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수 십 년째의 고립이었다. 묘역은 법성사와 우리들리조트 골프장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가뜩이나 외진 곳에 입구도 없어 돌담을 뛰어 넘어야 했다. 절의 소각장과 돌무더기를 지나, 무성한 잡초들을 가로 질렀다. 가는 길 내내 인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 공동묘지는 입구조차 없는 데다, 무성한 잡초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겨우 도착한 그곳엔 검붉게 녹슨 대문과 거무튀튀한 위령탑이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수 년 간 휘몰아친 비·바람의 흔적들이 나무와 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거의 뉘어가는 나뭇가지들로 가린 현판은 이곳의 정체를 그나마 또박또박 설명했다. ‘남.영.호. 조.난.자. 공.동.묘.지.’

바다에 숨진 영혼들을 위로하고 사고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이들에게 열어 둔 공동묘지는 돌보는 이 없어 한기가 끼쳤다. 풀이 무성한 채 정돈되지 않는 공동묘지는 바로 양옆에 말끔한 골프장과 으리으리한 사찰과는 또렷한 대조를 이뤘다. 골프장을 바라보는 위령탑 주변에 골프공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위령탑은 하얗던 본 모습을 잃고 거무스름한 때가 끼어 볼썽사나웠다.

600평(1980㎡) 남짓한 공동묘지에 안장된 무덤은 전체 21기. 연고 없는 분묘가 17기, 유연 분묘 4기가 안장됐다. 꽃다운 나이에 숨져, ‘영혼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의 비석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유족 측의 요청으로 시가 벌초한 흔적을 보였으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넝쿨들이 뒤엉킨 채 스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바다를 다스리는 탑’으로 만든다더니…

▲ 위령탑.
“예전엔 그나마 사정은 나았지. 유족들이 매해 꾸준하게 벌초도 하고 위령제도 지냈으니까. 워낙 시내에서 동떨어진 곳에 있는데다, 골프장도 생겨서 유족들도 서서히 관심을 접더라고. 세상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곁에서 김동일 씨가 무덤가에 잡초를 맥없이 뽑으며 말했다. 지난 2005년까지는 유족들이 사고 당시 선주로부터 받은 피해보상금 300만원으로 벌초를 했다. 대부분 무연분묘라서 친족도 아니지만, “제 조상으로 여기며 관리했다”고 전했다. 유족들이 나이가 들고 일부는 세상을 뜨면서 현재 김 씨만이 이곳을 외롭게 지키고 선 상태다.

그가 회고한 대로 1971년 3월, 서귀포항에 위령탑이 섰을 때는 사정이 정반대였다. “슬픈 탑으로 남기지 말고 슬픔을 극복하고 지성으로 바다를 다스려 힘차게 전진하는 탑으로 남겨야 한다.” 제주신문 1971년 7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이승택 도지사는 위령탑 제막식에서 이같이 밝혔다.

원래 서귀포항에 건립된 탑은 항만 확장으로 인해 현재 영천동 골프장 인근으로 1982년 9월에 옮겨졌다. 김 씨에 따르면, 당시 서귀포시 주요 인사들이 “서귀포항을 관광미항으로 조성하는 데, 참사라는 역사적 사실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위령탑을 바다와도 한참 거리가 먼 중산간 지역에 옮기게 됐다. 지난 2006년 조성된 골프장은 공동묘지 진입로를 막고 별도 보상도 없이 지었다. 뒤늦게 안 유족들이 항의도 했지만 골프장 측이 “수소문했지만 연락할 수 없었다”고 운운하면서 속수무책 여기까지 왔다.

▲ 남영호 사고 유족대표 김동일 씨가 위령탑을 가리키며 당시 사고를 회고하고 있다.

시, “공공 관리 대상인가 아직 의문…”

김 씨는 아직도 옛 생각만 하면 화가 치민다. 그의 어머니 故 정계생 씨를 비롯한 수 백명의 죽음은 당시 돈에 눈 먼 선박업자, 밀감 과적을 눈감았던 당국, 피해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치안국이 앗아낸 ‘인재(人災)’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른 척을 하다니….” 김 씨는 올해 벌초도 이 때문에 “거지처럼 몇 십 만원 지원해 달라”고 말해야 했다.

대부분 고령이 된 유족들은 5년 전부터 묘지와 탑을 서귀포시가 관리해 줄 것을 줄곧 요구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서귀포시는 유족 4명의 명의로 소유된 공동묘지를 행정이 관리할 법적 근거가 없고 명분이 부족해 난감한 입장을 드러냈다.

▲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넝쿨들이 뒤엉키고 골프공이 곳곳에 놓여 있는 공동묘지.

양행수 서귀포시 사회복지과장은 “어째서 공공적으로 관리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야 시가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 과장은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장기간 방치되고 있는 무연분묘를 납골당에 별도 공간을 마련해 모시거나, 시의 방침을 만들어 매년 예산을 반영해 공공적인 관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양 과장은 이어 “유족들이 요구하고 있고,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있는 만큼, 어느 쪽으로 보존하면 좋을 지 접근에 관해 반드시 고민 하겠다”면서 “관련 예산 확보는 추경(추가경정예산) 때라도 단계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유족 김 씨는 “유족들이 바라는 건, 진입로도 만들고 매년 벌초를 해주면서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라며 “그냥 이 상태로 놔두면 언제고 골칫거리 신세가 될 게 분명하니 해결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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